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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맛

바람의 기분

_봄밤 2014. 2. 18. 16:00



내 자리에서는 내 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장서수가 손꼽히는 이곳 도서관의 풍경은 학생과 책, 대체로 그 둘의 놀랍도록 다양한 조합이다. 책을 다섯 권 이상 쌓아 놓고 읽는 사람, 한 권을 두 손으로 펼쳐서 집중해 보는 사람, 흐트러진 책 사이로 어제의 잠을 마저 자는 사람, 머리칼과 머리칼, 책이라는 로맨틱한 물체를 통해 사랑을 대화하는 연인들. 그곳에 아이러니한 풍경 하나 추가다. 한쪽에 마련된 복사실에서 복사와 제본이 쉴새 없이 일어난다는 것. 저작권에 위배가 되기 때문에 책 복사를 금한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자료가 필요한 이들에게 어떤 복사는 피할 수 없는 일일 것. 하루에도 몇 번이나 제본 문의가 들어오고 날짜를 조정한다. 그래서 영업시간이 끝날 때까지 복사기는 조금도 쉬지 않는다. 더 아이러니 한 것은, 이 소음 속에서 사람들이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생각하건데 위위잉 거리다가 철컥 하며 복사물을 뱉는 기계음은 시끄러운 것으로 안정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산지 거의 십년이 다되가는 노트북의 유난한 타자소리도, 아직 다 낫지 않은 코의 훌쩍임도 넉넉히 가리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크게 들리는 의자와 바닥의 마찰 또한 쉽게 감춰준다. 누군가의 기침, 누군가의 발소리가 아니라 복사기의 소리라는 것은 큰 위안이 된다. 복사기는 큰 시끄러움으로 나의 미안을 가져간다. 시끄러움을 갖고 있으면서 복사기는 미안해 하지도, 어려워 하지도 않는다. 당당히 제 소리를 지킨다. 사람들이 복사기의 소리를 뭐라 하지 않는 것은 복사기의 운명을 이해하기 때문에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복사기 : 복사할 때 소리를 내는 것. 리드미컬한 종이의 움직임. 끊임없는 기계음. 언젠가 아주 조용한 복사기가 나와서 꾸밀 도서관이 있다면 그때는 누가 나의 훌쩍임을 이해해 주지? 복사기는 힘차게 덜그덕거리고 종이를 옮기고 글자를 찍는다. 복사기에 대한 이해가 바뀌지 않기를. 그것이 사라지면 내 코는 들어 줄 사람이 없다. 



이 짧은 글을 적으면서 복사기 소리에 집중을 했더니 그 소리는 어느샌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버렸다. 지금까지 의문을 갖지도, 시끄러워 하지도 않으며 이곳에 앉아 있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맙소사. 나는 복사기 소리를 들어버렸고, 이제는 그것이 분명하게 시끄럽다고 생각한다. 말하자면 어제까지는, 복사기가 소리를 내되, 나는 듣지 않고 있던 것이 아닐까? 복사기의 운명을 이해하기는 개뿔. 나는 그것의 운명을 이해할 수 없다. 듣지 않고 있을 뿐이지. 복사기를 전혀 생각하지 않았을 때 그것과 아무렇지 않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알아버리고 나자 귀가 급속도로 피곤하기 시작했다. 아프도록 시끄러운 소리. 나는 복사기 소리를 들어버렸다. 정말로 시끄럽다.



그렇다면 소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음을 들었다는 것이 중요해지는 걸까? 아랫층 꼬마 돼지는 새벽 다섯 시까지 게임을 멈추지 않는다. 이 사실은 나 역시 5시까지 자지 않았던 것을 말한다. 벽을 타고 올라오는 소리가 단정한 음가를 전하지 않는 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 아직까지 내 귀가 꼬마 돼지의 음가에 미세하게 맞춰져 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앞으로도 그의 말을 듣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들을 수 없기를. 여전히 웅성거리는 뭉개지는 음이기를.



당신의 목소리가 어느 날 소리로만 들어온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일까. 나는 당신의 소리에서 마음을 읽기를 바라지만 내 능력은 말로 전해지는 뜻 이상의 마음을 아직 구분해낼 수 없다. 그러나 뭉개지는 음성이라도 세분해서 복원하고 싶다. 내 귀가 그렇게 발달하기를. 귀쪽으로 마음이 크게 기울기를. 나의 관심이 나를 성가시게 하거나 잠재우지 못하는 소음이 아니라, 당신 말하지 않는 때라도 당신 주위를 움직이는 바람의 기분에 가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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