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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의 깊이
김사인
바람 불고
키 낮은 풀들 파르르 떠는데
눈여겨보는 이 아무도 없다
그 가녀린 것들의 생의 한순간,
의 외로운 떨림들로 해서
우주의 저녁 한때가 비로소 저물어간다.
그 떨림의 이쪽에서 저쪽 사이, 그 순간
의 처음과 끝 사
이에는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가, 아니면 아직 오지 않
은 어느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보일 듯 말 듯 옅게 묻어 있는 것이며,
그 나른한 고요의 봄볕 속에서 나는
백년이나 이백년쯤
아니라면 석달 열흘쯤이라도 곤히 잠들고싶은 것이다.
그러면 석달이면 열흘이며 하는 이름만큼의 내 무한
곁으로 나비나 벌이나 별로 고울 것 없는 버러지들이 무
심히 스쳐가기도 할 것인데,
그 적에 나는 꿈결인 듯
그 작은 목숨들의 더듬이나 날개나 앳된 다리에 실려
온 낯익은 냄새가
어느 생에선가 한결 깊어진 그대의 눈빛인 걸 알아보
게 되리라 생각한다.
김사인, 『가만히 좋아하는』, 창비, 2006.
누군가 내게 좋아한다는 말을 단 하나의 거짓도 없이 할 수 있는 순간이 있겠는가 묻는다면, 이 시를 읽을 때의 얼굴이라고 하겠다. 지금 읽자니 약간 멋쩍고 번거로운 말들도 보이지만, 시간을 살아낸 '갖춤'이라고 하면 어떨까. 그건 어쩌면 모서리 반들반들해진 오래된 가구에 수 없이 묻어나간 손자욱 같은 것. '무한히 늙은 옛날의 고요'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속할 어린 고요'가 내리는 '봄볕'을 이야기 하는 시는 아득한 깊이의 꿈을 그저 헤매는 듯 하다가, 한순간 '그대의 눈빛'을 말하며 나, 살아있는 몸뚱이, 주위를 두리번 거리며 지금의 '곁'을 돌보게 한다.
아득한 깊이를 다녀왔는데 발을 헛딜 새도 없이 '현재'에서 깨난다. 꿈과 꿈 저편의 지금을 동시에 이야기 하는 시에는 고통도 없고 추위도 없는데, 그것은 한 없이 작은 '내'가 겨우 느끼고, 볼 수 있는 것이 한 조각의 '빛'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파리 하나, 벌레의 다리, 무엇 하나 아름답지 않을 수가 없다. 세상에 처음 존재하는 이처럼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눈이 된다. 이 모두를 보는 '나'는 가만히 죽어있다가,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풍경의 깊이를 올라와 지금에 도착하는데, 내 옆에 '그대' 역시 나처럼 한없이 작았던 이었음을 알게 된다. 내가 있음으로 인해 생기는 다시 없을 외로움과 온갖의 고요를 당신의 눈빛으로 마주하자마자 알아버린다.
이 시를 읽은 네 개의 계절이 네 번을 지났다. 서른 개의 겨울을 모두 지났고, 어쩌면 살아있고, 모양을 갖춘 것이 되었다고 이제는 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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