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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정말 좋았다 - 김소연

_봄밤 2022. 6. 17. 11:36

 

정말 정말 좋았다

 

 

김소연

 

갑자기 우렁차게 노래를 불렀다

연료가 떨어진 낡은 자동차처럼

 

너는 다음 소절을 우렁차게 이어갔다

행군하듯 씩씩하게 걸었을 거다

 

같은 노래를 하면

같은 입모양을 갖는다

같은 시간에

같은 길에서

 

모퉁이를 돌면서

같은 말을 동시에 할 수도 있다

", 보름달이다!"

와 같은

 

모퉁이를 돌아도

꿈이 휘지 않는다는 착각을

나누어 가진다

 

땀을 뻘뻘 흘리는 눈사람에게

장갑을 끼워줄 수도 있다

장갑차에게 꽃을 꽂아주듯이

 

가로등이 소등된다

우리의 그림자가 사라진다

저 모퉁이만 돌면 우리, 유령이 되자

담벼락에 기댄 쓰레기봉투에서

도마뱀이 꽃을 물고 기어나오듯이

 

숨어 있는 것들만 믿기로 한다

병풍 뒤에 숨겨진 시신처럼

우리는 서로의 뒷모습이 된다

정말 정말 좋았다

 

 

<수학자의 아침>, 2013

 

 

 

 

-----

 

가장 좋은 문장은 바로 여기다. 

 

"같은 노래를 하면/ 같은 입모양을 갖는다"

 

이 문장에서 시작해 너와 나는 우리가 된다. 이 시에서 '우리'는 모퉁이 하나를 돌면서 세 번 생각한다. 첫 번째 생각은 우리가 같은 말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생각은 꿈이 휘지 않는다는 '착각'을 함께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생각은 함께 유령이 되자는 약속이다. 모퉁이를 돌며 집으로 돌아갈텐데, 거긴 현실이 아닌 다른 곳이다. 우린 죽은 사람처럼 병풍 뒤에 있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로 한다.  

 

같은 노래를 하면, 같은 입모양을 갖는다. 둘이라면 아름답고, 그게 둘이라면 내내 아름답겠지. 

 

앞의 두 연을 제외해도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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