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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민구

 

 

 

여름을 그리려면 종이가 필요해

 

종이는 물에 녹지 않아야 하고

상상하는 것보다 크거나

훨씬 작을 수도 있다

 

너무 큰 해변은 완성되지 않는다

너무 아름다운 해변은

액자에 걸면 가져가버린다

 

당신이 조금 느리고

천천히 말하는 사람이라면

하나 남은 검은색 파스텔로 

아무도 오지 않는 바다를 그리자

 

당신의 여름이 기분이거나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여행지라면

시원한 문장을 골라서 글로 쓸 수 있는데

 

여름이 오려면 당신이 필요하다

모두가 숙소로 돌아간 뒤에

당신이 나를 기다린다면 좋겠다

 

파도가 치고 있다

누군가는 고래를 보았다며 사진을 찍거나

주머니에서 만년필을 꺼내겠지만

 

고래는 너무 커서 밑그림을 그릴 수 없고

모래는 너무 작아서 부끄러움을 가릴 수 없다

 

바다가 보이는 방에서 두 사람을 기다린다

그들이 오면 여름은 지나가고

방문을 열면 해변이 사라져서

나는 아무것도 못 그리겠지

 

그래도 당신과 

오리발을 신고 있겠지

 

 

 

당신의 여름이 기분이거나/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여행지라면/ 시원한 문장을 골라서 글로 쓸 수 있는데

 

진은영의 <청혼>이 여름판 같애!

https://motoong-e.tistory.com/449

 

청혼-진은영

  창작과 비평 2014. 가을호.

motoong-e.tistory.com

 

여름에 더워한다면 시원한 문장을 써주겠다는 마음좀 봐. 

좋아한다는 고백을 이렇게 하는 사람과의 나날을 생각해 봐.

생각만으로 침이 고이고 눈이 시려 매일매일 얼마나 눈을 찡그렸다가 웃음을 터뜨리게 될까?

 

여름이 오려면 당신이 필요하다/ 모두가 숙소로 돌아간 뒤에/ 당신이 나를 기다린다면 좋겠다

 

언젠가의 대학가 MT에서 밖에 나와 어정쩡하게 서로를 찾던 날들이 떠올라.

별 얘기 없이 쪼그려 앉아서 그건 기다린 것도 아니고 기다리지 않은 것도 아니라

어둑한 가로등 아래 서로를 발견하고 괜히 마음이 달뜨던 시간들. 

 

그때 우리는 모두 비슷한 나이였다. 구부정하게 커서 한참 어렸었는데. 그 일들이 모두 지난 여름에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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