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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하게, 그러니까 잘 살아있는 사람은 자신의 맥박을 느끼지 못한다. 어딘가 아플수록 맥의 표시는 강렬하게 눈에 띈다. 잦아들수록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나의 리듬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그것과 잘 어울려 살고 있다는 뜻일 테니까.

 

생명의 조건으로서의 리듬이 있고, 인간으로서 살아가게 만드는 리듬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노래로, 춤으로, 혹은 글이나 혹은 무엇으로. 리듬을 재능이라고 바꿔서 말해도 좋겠지만, 딱 맞는 표현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리듬이란, 자신을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 무엇이다. 자신의 재능을 알고 있지만 그 재능을 좋아하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도 있을 테니까.

 

리듬이 많은 사람은 화려할 것 같다.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이것으로도 살 수 있고 저것으로도 산다. 한때 나는 나에게 그것이 글이라고 믿었다. 나는 춤을 좋아하거나 잘 추지는 않지만, 글로는 꽤 멋지게 보여줄 수 있지. 내가 살아있는 리듬의 증거는 내 글 속에 있어. 중요한 건,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거나 말거나 상관 없다는 점이다.

 

내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쓰기의 리듬이 잦아들고 있음을 느낀다. 무언갈 써야겠다고 다짐했던 시절이 저번 생애의 것만 같다. 그동안 나는 꽤나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인간이 되었다. 시와 가까워지려고 했던 생각을 많이 잃어버렸다. 물론 이것은 핑계일 수도 있다. 원래의 자질이 옅었다거나.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던 패기는 꺾여서 이젠 거의 없다. 그게 뭐라고 꺾였을까. 그냥 내가 쓰고자 하면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을 시대인데. 그동안 문장을 생각하는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고, 단어를 이리저리 돌리고 깎고 끼우던 시간이 사라졌다. 누군가를 기쁘게 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순전히 내가 생각하는 것을 잘 꺼내놓기 위한 시간, 펼쳐 놓고 볕에 말려 놓던 시간. 가끔 그것의 뒷면을 뒤집어 보았던 시간. 나의 옷과 같았던 따뜻한 우울과 집중의 시간. 그것이 잦아들고 있어 소리가 커짐을 느끼고 있어, 이렇게 적는다. 이 리듬이 사라지고 나면 나는 어떻게 살게 되는 걸까?

 

에너지가 바뀌는 것처럼, 글을 쓰던 시간은 몸을 움직이는 시간으로 움직인다고 적는다. 글쓰기의 에너지는 홀드를 잡고 올라가거나, 수영을 하거나, 언더로 공을 받는 데 집중한다. 그전까지는 내가 하는 모든 경험이 글쓰기의 재료가 될 거라고 믿었다. 그러기 위한 직장, 그러기 위한 생활. 그러기 위한 이사, 그러기 위한 사랑. 그러기 위한 이 세상과 나의 거리. 나는 나를 액자에 담아 보는 데 익숙했다. 액자 안의 나와 그 곁의 당신들. 그러나 이제 액자는 없고, 순수하게 운동을 체험하는 몸이 있다. 무엇을 적기 위한 재료가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본질이 되는 순간을 느끼고 있다. 

 

우두커니 앉아서 흰 종이와 싸우던 시간. 시간의 한 함도 없고, 나만 알고, 나만 이기고 지던 날들. 그 복잡하고 애쓰는 마음을 누구에게라도 말하고 싶지만 그럴 힘이 없어서 혼자 만족했던 글들. 다시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시간이 필요하다. 나는 그 시간을 마주하는 일이 자신 없는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지고, 흰색을 보기도 전에 아주 진다.

 

텅 빈 흰색.

이 생각조차 거칠게 적히는 것이 또한 얼마나 슬픔인지, 언젠가의 내가 제대로 알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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