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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사에서 만난 사람 1


대만에서 용산사를 가지 않을 수 없는 방법은 별로 없다. 당신이 대만에 처음 간다면, 반드시 코스에 포함될 것이다. 첫 번째 여행에 가지 않았다면 그 이유로 두 번째 여행에 포함될 것이다. 당신이 혹시 스물 한 번쯤 대만에 다녀왔다면 용산사는 생활일 수 있다. 당신이 대만에 산다면, 한 해에 몇 번은 마음을 먹지 않아도 용산사가 당신을 불러 맞으리. 역 이름이 용산사이고, 출구 하나도 당연히 용산사를 가리킨다. 나가서 오분을 채 걷지 않아도 용산사. 역세권. 그러므로 용산사의 입구란, 용산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 지하철 역 출구부터 시작한다고 할 수 있다. 지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참이 이렇게 넓어야 하는지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넓다, 는 느낌의 지하철역이다. 아직 용산사를 가보지 못하는 이에게 이 역 출구의 넓이는 마치 용산사의 규모를 미리 짐작하게끔 하는데, 얼마나 큰 절이기에, 하는 호흡도 필요한 지점이다. 입구로 올라서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바퀴가 달린 철바구니에 꽃을 담아 파는 아주머니였다. 그녀는 주먹보다 작은 꽃을 팔고 있다. 절 입구에서 파는 꽃이란 봉양에 필요한 것인 듯 했다. 작은 꽃을 사는 일은 어렵지 않고 그 때문에 소소하게 팔 수 있는 듯 했다. 그러나 타지에서 온 이가 마치 나의 오후인 것처럼 하는 일은 어려웠다. 그녀의 간곡한 웃음을 지나는 일이 그랬다. 시야는 이제 소일 없이 주변을 오가는 할아버지들의 손 주머니한 모습이다. 두개가 함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한쪽만 함하는 경우도 있지만, 마땅히 놓일 만한 곳이 없어서 손이 보이지 않는 모습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언제부터인지 언제까지 일지 알기 어려운 천천히 주변을 움직이는 할아버지를 지나 비로소 용산사의 입구에 들어서면 둘에서 셋은 용산사 입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 포즈는 비로소 용산사에 도착했다고 일러준다. 당신은 그 포즈로 용산사의 입구를 다른이에게 알릴 수도 있다.


용산사는 대만의 가장 오래된 절이다. 여기서 '가장'이라는 느낌은 연식의 고루와 맞닿지는 않는다. 가장, 사랑을 받는다는 뜻으로 읽혔다. 한국의 절이 익숙한 이에게 외국의 절이란, 눈에 거슬리는 비율이라고 말 할수 있을 듯하다. 외국의 절은 어딘가 머리가 약간 크고, 그 장식이 다소 화려하고, 어깨가 솟았다는 느낌. 그런 불편함이 이곳에서는 자신을 합당하게 드러내는 이름일테지만, 외국에 왔다는 느낌은 이 편하지 않는 비율, 그래서 어딘가 불편한 느낌으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 같다. 익숙한 것과 익숙하지 않은 것에 늘 이런 설명이겠지만, 어쩐지 절이라는 양식에는 나의 기원을 생각하게끔 하는 게 있다. 내가 편해하는 것들. 수세기가 지나도 지하쳘 역으로는 찾아갈 수 없다고 믿고 싶은 그곳의 절들. 그 절이 보여주는, 이곳을 믿을 수 없게 하는 절경까지. 거기까지가 내가 사는 곳이라고 믿게 하는 것 같다. 


이렇게 많이 썼지만 아직 용산사를 들어가지도 못했다. 세상에, 용산사의 입구를 마저 들어가보자. 놀랄 것이다. 크지 않다. 지하철역 입구의 거대함이 용산사를 품고도 남을만큼 작다고 말하고 싶다. 가람이라고 우리의 그것처럼 산 하나 통째를 자신의 경관으로 삼고 이어질 듯 말 듯 건물이 동리를 형성하는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대만의 일반적이 건물에 비해도 이 절은 소박한 땅에 옴추려있다. 그런데 절은 마치 오래된 나무에 수많은 새들이 쉬듯 속속들이 사람을 품고 있었다. 주말이나 주중이나 구분을 말하고 싶은데 기억이 거까지는 안난다. 하여간, 낮시간이었다. 한낮의 도심 속 절에는 이 절을 한 번 후두두 흔든다면 날아갈버릴 수많은 세때처럼 사람들이 옹기종이 앉아있었다. 여행자도 많았지만, 대만 사람들도 많아서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으로 작동하는 질서가 있었고 그것을 낯설어 하면서도 곁눈질로 하나 두개쯤 배워가는 이상한 풍경이 있었다. 용산사의 안쪽은 데워지고 있어, 이 수선함 속에서 내가 있을 장소를 찾아간다. 


대만의 가장 유명한 절이니만큼 그 안에서 관광객이 할 일은 잘 알려져 있고, 그것은 할 수 있는 일이 어느만큼 정해져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곳에선 점을 칠 수 있다. 외국의 절에서 치는 점이라. 어차피 읽을 수도 없고, 크게 무엇을 기대할 수도 없지만 그럴듯하지 않나. 절에서 점을 볼 수 있다니. 한켠에 나무 함이 마련되어 있고, 통에 잔뜩 나무막대기가 있다. 그게 다 점치는 도구들이다. 뭘 던져서 어떻게 나오면 비로소 나무막대기를 뽑을 수 있는데, 이건 여행 책자와 블로그가 친절히 알려준다. 나는 그런걸 알려줄 수는 없고, 그에 임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좀 쓸 수 있을 뿐이다. 여행을 다녀온지 2년이 지나 이 일대기를 쓰는데, 그때 생생히 준비해갔다고 해도 여전히 내게는 뭘 어떻게 던져서, 어떻게 나오면, 점이라는 내용이었다. 얼망하게 알아갔던 이유는 아마도, 어떤 자세한 설명을 통해 점치는 절차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었더라고 하더라도, 종내는 점에 임하는 내 마음이 이미 틀렸다는 심정에서였다. 완전히 믿지 않아도 좋았으면 했다. 내가 읽을 수 없는 점, 읽는다 하더라도 뜻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점'을 믿을 낙관이 내겐 없다. 가볍게, 점치는 일을 했다. 정도면 좋았다.


반달모양의, 반질반질한 나무조각이 바닥을 튕겨오는 게 좋았다. 사람들은 저마다 맞다고 생각하는 방법으로 점을 치는 중이었지만, 그게 맞는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침내 상자를 열어서 운세가 적힌 종이를 뽑고 그저 그걸 뽑아들었다는 기쁨으로 가벼운 관광객 행사를 마쳤다. 그리고 나의 잠깐 전을 보듯 내 뒤에온 사람들은 또 그 나무를 던지고, 뽑고, 통에가서 작은 종이를 가져간다. 


절 가운데에는 본격적으로 절과 관련된 법회, 를 하는 분들이 있고, 그 주위를 둘러서 신도와, 그와 상관없이 쉬고 있는 이들이 가깝게 어깨를 잇고 있다. 나도 그들 중 한사람이 되어 이 선을 연장한다. 그리곤는 주섬주섬 노트를 꺼내 주변을 그려보자는 마음이었다. 이곳은 소란스럽다.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소리가 부딪힌다. 나는 고독해져서 이 소란을 방해하기로. 보이는 것을 따라 그렸다. 그때, 내 옆에 있는 아주머니가 말을 걸었다. 


(일본어) 안녕하세요!?

나는 대답하지 못하고 옆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분명하게 나에게 인사했고, 나는 어쩐지 따라서 인사했다.

 

(일본어) 안녕하세요?!

아주머니는 눈을 반짝이며 세상에 반가워하며 몇 개의 문장을 연달아 말했다. (일본어)(일본어) 

우리의 대화는 그때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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