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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곤

느림보 마음-문태준

_봄밤 2014. 1. 28. 15:43



느림보 마음

문태준 / 마음의숲 / 2009
 
문태준 첫 산문집. 손이 묻어나는 표지. 행간이 넓어서 글자가 한 줄씩은 더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뒷짐을 지고 천천히 걸어가는 그의 말씨. 그의 생활과 가족사이로, 느릿느릿 움직인다.

매병과 연못

매병을 가만히 보고 있습니다. 매병은 구멍의 어귀가 좁고, 어깨는 넓으며, 밑은 홀쭉하게 생겼습니다. 매병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다소 허리통이 큰 사람의 몸 같습니다. 수일 전부터 나에게는 매병을 즐겨 바라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하고, 졸음을 이기지 못할 때마다 매병을 바라봅니다. 매병은 마음의 성成을 잘 지킵니다. 나는 매병을 볼 때마다 "차라리 스스로 뼈를 깨고 가슴을 갤지언정, 망령된 마음을 따라 악을 짓지 말아야 한다."는 말씀을 떠올립니다. 125

매병이 매혹적인 까닭은 어귀가 좁기 때문입니다. 매병은 아주 입이 작습니다. 매병은 말수가 적습니다. 내보내는 일을 삼가는게 있으므로 겸손합니다. 매병은 계절로 치자면 겨울의 심성을 지녔습니다. 그것은 제 몸 안에 침묵을 쌓아두고 있습니다. 126

매병처럼 목숨을 받으면 무료하지 않을까를 처음에는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나는 매병의 구멍에다 입김을 불어넣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부터 몹시 화가 나면 매병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오, 나의 매병. 나는 이부자리에서 일어나면 매병을 먼저 찾기 시작했습니다. 오, 손이 너무 늦은 매병. 오, 늘 한자리에 있는 나의 매병. 126

릴케는 "적대감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했습니다.
(…)
그러나 나와 당신 사이에 매병을 놓아둔다면, 나와 당신 사이에 저 연못을 놓아둔다면 우리는 적대감을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127





: 문화재청 헤리티지 채널로 이동해요♭






매병은 아주 

입이 작습니다. 

매병은 말수가 적습니다. 

매병처럼 목숨을 받으면 무료하지 않을까를 

처음에는 걱정하기도 했습니다.

오, 손이 너무 늦은 매병. 

오, 

늘 한자리에 있는 

나의 매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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