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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_봄밤 2015. 7. 12. 18:20



비가 하루를 꽉 채워 내린다. 열기가 덜 식은 공기로 실내는 아직 답답하다. 백여보 정도 걷다 왔다. 슬리퍼 사이로 빗물이 들어왔고 그것은 시원하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기분 좋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건물 일층에는 비를 맞지 않는 그늘에 푸들 두 마리가 묶여 있다. 주인은 건넛집 사람으로 이쯤되면 거의 방치라는 생각도 든다. 이제 내 얼굴을 알아보는지 제법 조용히 있다. 큰 눈을 굴려 내 얼굴께를 보기도 한다. 비굴한 귀여움이라는 생각이 스쳤고 그런 생각이 윤리적이지 않다는데 미쳤다. 미안해졌다. 충분히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나도 모르게 생각을 하여 나로 하여금 미안하게 만든다. 이런것까지 나라고 해야할까. 쉽게 동의할 수 없지만 우선은 그래야겠지. 더운 공기가 뱃속으로 밀려 들어간다. 


아빠와 통화를 했다. 팥을 심고 계신다고 하셨다. 팥을 심는 아버지. 나의 이해는 아버지가 일을 하고 있다는 추상적인 활동에 그친다. 우선 팥을 어떻게 심는지 전혀 알 수 없다. 팥의 모종을 떠올릴 수 없고, 어떤 땅에 심는지도 그려지지 않는다. 단단하고 붉고 한가운데 검은 줄이 있는 팥알만을 떠올리는 나다. 다만 팥을 이 때 심는 거구나. 칠월, 비가 오는 밖을 바라본다. 어쩌면 이미 심을 때를 넘겼을지도 모른다. 시간과 장소가 전부인 농사에 아버지는 둘 중에 하나는 쉽게 놓치셨다. 쉽다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다는 걸 알지만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아직도 정신을 못'차린다는 부연 설명이 늘 따라왔으므로. 전부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아버지에겐 조금 늦거나 조금 다른 곳에 있어도 개의치 않았던 너그러움이 있었다. 아버지께 중요한 것은 전부가 아니라 '하는 것'이니까. 팥을 심고 계신다. 동지에는 팥죽을 먹겠다. 그보다 전에 있는 추석에는 팥소가 있는 송편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일분이 넘지 않는 통화라도 전화는 다행스럽다.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이 날이 갈 수록 진하다.


요새는 성경을 읽고 있다. 내용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렇다는 말을 따라갈 뿐이고 성스럽고, 단호하다는 목소리라는 데 겨우 동의할 뿐이다. 이 얇은 종이가 찢어지지 않게 넘기는 것이 기쁨이다. 실은 찢겠다는 의도 없이는 찢을 수 없는 얇음인데. 이 얇음을 이해하고 팔랑 하는 소리와 함께 넘기는 행동이 꽤 마음에 드는 것이다. 가끔은 성경에 대해서, 아니 무엇에 대해서라도 이야기 하고 싶다. 아버지와. 혹시 내가 모든 이야기를 궁금해 하는 나이어서 잘 떠들 수 있거나. 내가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대충이라도 알고 있기 때문에 떠들 수 있었으면. 침묵을 말하고 침묵을 듣는다. 오랫동안 그래왔다. 나는 조금 더 확실한 말을 듣고 싶다. 이 비가 확실하게 오는 것처럼.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말은 전혀 닿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이에 없는 단어이기 때문에. 공유되지 않은 앎을 이야기 할 순 없다. 아버지에 대한 사랑에 대해서 아버지는 아마도 잘 모를 것이다. 추정이 아니라 거의 확실하다고 생각된다. 이쯤되면 아버지와 나 사이에 꽤나 문제가 있었나 여기겠지만 아니다. 고백하자면 나는 어떤 사람에게도 이 글자를 설명할 수 없다. 글자를 푸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기 위해 몇 바닥을 써야 할지 모르며. 그것보다 더 그럴만한 힘이 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비가 하루를 꽉 채워 내리고 그 비가 떨어지는 높이 차이로 드러나는 존재가 있다.


나는 아직 기꺼이 비를 맞을 수 있다. 그런 것으로 나를 알게되는 연장선에 있다. 아버지는 팥을 심고 계시는데 내가 이해할 수있는 것은 이 빗속에서 얇은 비닐 우의를 입고 팥이 열리기로 약속한 모종에 흙을 붇돋는 모습 뿐이다. 아버지는 그것이 팥이라고 믿고 있다. 팥은 팥이라는 믿음을 아버지에게 준다. 나는 그러지 못했다. 말씀도 드린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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