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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 양>을 보았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가만가만 물어오는 물음에 휘청거려서 한 번에 끝까지 보지 못했다. 

 

미래 언젠가. 여전히 사람들은 가족을 꾸린다. 사피엔스는 여러 종류가 있어, 테크노 사피엔스와 복제인간과 우리가 아는 인간이 어울려 산다. 

 

테크노 사피엔스는 일종이 기계 사람이다. 고장나면 부패하고, 그들의 기억 구조는 현재 인간의 뇌처럼 미지의 세계이며 연구 대상이다. 복제인간은 말 그대로 복제인간이다. (자세한 것은 영화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는다)

 

인간은 테크노 사피엔스를 가정용 보모처럼 들여서 함께 산다. 그는 충실한 보조인이다. 그는 나이 들지 않는다. 고장나서 주요 부위를 재활용하거나, 버려진다. 인간이 아무리 예의바르게 동등하게 그를 대하려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족이지만 가족이 될 수 없다. 그는 숫자로 존재한다. 아마 인간도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영원히 함께 하는 것인지, 보증기한까지만 함께 하는 것인지. 그를 만들어 낸 회사에서는 보증하지 못하면 이제 양을 어떻게 구해야 할 것인가. 양에게는 죽음이 찾아오지 않고 그의 인간 가족에게는 죽음을 인정하거나 맞이할 자세를 주지 않는다. 

 

복제인간은 함께 어울려 살지만 어떤 인간이 경멸하기 쉬운 사람으로 등장한다. 이민자나,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사람을 은유하는 것도 같았다. 넌 진짜가 아니야, 우리와 달라, 경멸 당하는 이들. 그러나 구체적으로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이 다양한 개념의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 인생을 꾸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누가 꾸릴 수 있는 것인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끝이 무엇인지 끝없이 물어온다.

 

저게 어째서 인간이 아닐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인간이 아니라고 해서 그게 어쨌단 말인가?

인간이 되고 싶거나, 부러워 하지 않았느냐는 너무나 인간적인 물음과 함께

 

양의 고장 후 기억을 영화처럼 캡슐처럼, 조심스럽게 살펴보는 가족들. 양의 기억은 아주 아름다운 쇼츠처럼 짧다. 우리가 사진으로 일부를 찍어 놓듯이. 누군가의 기억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아마 이런 모양이지 않을까 싶은 구현이었다. 내 기억을 누군가 볼 수 있다면 예쁜것만 있어야할텐데. 기억이란 생각보다 대단하지 않은 짧은 행복의 순간들로 저장되어 있었다. 양의 바라봄 사이에 문득문득 존재했던 사랑이 지나가고, 복제 인간의 최초 인간이었던 고모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죽지 않아온 양의 시선이 전생을 지나 피로하게 오늘에 도착한다. 

 

갈망하게 되지만, 인간은 죽고 나는 영영 남는 테크노 인간의 비애. 갈망한 이의 복제 인간의 얼굴을 다시금 바라보게 된 양의 눈. 양은 무척이나 끝을 원했을 것 같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티셔츠를 입고 웃는 양. 21세기의 영화가 그려진 티셔츠를 기억하는 양에게 현재에 마주한 이들은 너무나 아득히 멀리 있다. 양은 누구와도 <릴리 슈슈의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 하지 못했고, 그 노래를 어린 동생에게 들려주었을 따름이다. 

 

시간은 하나 밖에 없어, 그리고 나는 인간이지.

이런 것을 알려준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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