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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 로델/이승훈/후마니타스

이 책은 현재 논란이 되 어떤 분야와 붙여 놓아도 그것을 후려칠 수 있는 말본새를 갖고 있다. 법이 말하지 못하는 [정의]의 정의를 손으로 짚어가며 알려주다가 법의 말을 빌려 호되게 욕한다. 감정과 날씨와 별스럽지 않은 일에 자신의 기준을 잃고 또 쉽게 기준을 세우는 보통여자의 하루를 빌려 '법이 하는 일이 그와 다르지 않다'며 실컷 비웃는다. 39년에 쓰였고 57년도에 재판된 이것은 우리나라에는 85년 처음 소개 되었으며 2014년, 새로운 번역으로 등장했다. 책의 이력을 살피는 것은 출간한지 1세기에 가깝다는 것을 상기 시키기 위함이다. 글쎄, 너무 늦은 등장이 아닐까 싶었으나 한편으로 지금만큼 시기적절한 등장이 또 있을까 싶다.

엄숙한 분위기를 띄는 검정색 표지와 제목의 이 책은, 제목과 표지가 겁주는 것과 달리 말이 어렵거나 내용을 이해하기 힘들지 않다. 독자는 그저 법이 어렵다는 선입관이 실은 궤변과도 같은 법언어에 의해 지켜져 왔던 것을 새롭게 알아가면 된다. 저자의 목청이 법이 지켜왔던 일반사람과의 안전거리를 부시고 들어가 난투극 벌이는 것을 지켜보면 된다. 읽는 사람이 고려해야 할 것은 한 가지다. 하늘의 언어양 으스대는 법적 판결문에게 세상사를 맡아두었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지당하겠거니' 법의 이름으로 내려졌던 수많은 판결을 의심하는 일이다. 

책의 외양이 가진 무거운 기운이 쉽사리 나가지 않는 것 같다. 환기 시킬겸 영화 이야기를 할까 한다. 내가 둘 다 봐서 아는데, 영화와 이 책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 영화는 요새 개봉한 것으로, 만들어 지기 전부터 몇 번이나 엎어질 위기가 있었고 그때마다 십시일반 제작비를 꾸려 만들었다. 만들고 나서도 몇 차례의 시사회를 대대적으로 연 끝에 입소문으로 걸릴 수 있었던 영화이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는 것에서 무엇보다 '영화 같은' 위치를 갖는다. 삼성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아버지의 이야기 말이다. 이 책은 약 1세기 전에 쓰였으면서 영화에서 나오는 기업과 개인의 싸움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이야기한다. 왜 어려운 것인지 시원하게 예견한다. 

법원에 가는 데는 돈이 든다. 심지어 변호사의 청구서가 도착하기 전이라도 돈이 든다.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생에 걸쳐 한 번이라도 소송당사자가 되지 않으려고 하는 이유다. 농민과 노동자와 주부와 실업자도 부자나 대기업과 마찬가지로 불만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법을 조금이라도 살 능력이 없다. 239

아버지가 딸을 위해서 강원도에서 서울로 오갈 수 있었던 것은 물론 그의 의지가 굳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을 조금이라도 살 능력이 없던 그가 이 싸움을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돕는 노무사와 변호사가 보상을 바라지 않고 연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애초에 법을 살 능력이 왜 필요한 것인가? 그는 시위를 하고, 증거를 모으고, 지친다.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로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기업은 산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지당하고 정의로운 법은 이들의 논쟁을 중간에서 듣는다.  

법이 언제나 판매 대상이며, 대체로 최고 가격을 제시한 입찰자의 편에 선다는 사실은, 법 전체가 사기라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법의 자랑스러운 원칙들이 정말로 법률가들이 주장하듯이 확실성과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빚어진 알맞은 열쇠라면 법은 결코 판매 대상이 되어서 그것을 살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유리하게 기울어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235

법은 그렇게 최선을 다해 돕는다. 크게 소리 나는 곳을 돕는다. 큰 소리를 뻗대는 목구멍, 지위와 돈은 법을 돕는다. 제 아무리 많은 수가 반대를 하더라도 그 수는 세어지지 않는 수이므로, 시민의 반대와 험학한 정서는 소용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더욱더 부족 시대에 주술사, 중세에는 성직자, 그리고 오늘날에 법률가라는 말에 눈떠야 한다. 얼마나 멍청한가. 주술사의 말을 믿고 운명을 맡겨 벌벌 떨었던 모습이. 법에 떨며 옳고 가름을 기다리는 모습이 '그것과 같다'라고 한다면 우리는 대체 얼마나 놀라야 할까. 시대가 지나고 나서야 깨닳을 일이겠지만, 미리 알아두는 것이 심신에 이로울 것이다. 


법은 가난한 사람을 학대하고, 부자는 법을 다스린다. _올리버 골드스미스


책을 나가려다가 알맞는 말을 찾았다. 속을 가라 앉히면서 제목을 다시 한 번 말해보자.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법률가라는 말에 변호사 검사 판사만을 떠올리면 안된다. 순진하게 그들만을 생각했다면 정말 곤란하다. '입법'은 국회의원이 한다. 정치에 손을 올린 모든 이들은 법을 만들고 고친다. 이 제목에 두 번째나 세 번째로 비켜나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은 가장 첫 번째로 이 목소리를 들으라. 그들에게 빌붙어 자신의 이익을 정의로 소환하는 이들 역시 뒷짐 풀고 경청해야 할 언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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