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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세계는 이 따위일까. 악마라도 있기 때문일까? 아니 악이랄게 별게 아니더라. 당신과 닮은 것이 악이다. 

이렇게 만연한, 이런 망할 곳에서 과연 희망은 있을까? 를 두고 


바우만과 돈스키스가 대화를 나눈 것을 엮은 책이다. 그들의 치열한 생각은 프랑스 대혁명에서 조지 오웰의 소설을 횡단하고 이케아와 페이스북에 숨어있는 '악'의 모습을 캐 올린다. 모두가 우려하지만 대책을 궁리하지 못했던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정말 뜻밖이거나 아주 잔인하지 않으면 반응하지 않는 감수성의 말로는 어떤 것일까?" TV로 중계 되던 죽음에서도 밥을 먹었다, 9시에서 6시로 짜여지는 일과가 멈추지는 않았다.


틀에 부으면 변하는 모습처럼 사회는 언제든지 변할 태세를 갖추었다. 물건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와 동일해진다. 언제든지 더 나은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물건의 생태(이케아, DIY)와 인간의 꼴이 닮는다. 줄곧 미덕으로 지켜졌던 언어는 구식의 것으로 취급되는 가운데, 그러니까 요새 누가 '충성'이니 '배반'이니라는 말을 올린단 말인가. 유동적인 세계에서 유연하게 바뀌어야 할 것은 사람 역시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의 미덕으로 불리는 '변화', 언제든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는 개인 아닌가. 그렇다. 근대가 규정했던 지도 위 빗금-국가나 민족, 공간, 그 모든 것을 초월해 나를 내가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 나의 '정체성'까지도 그럴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체성이라는 것은 사회화, 그러니까 사람과의 교류에 의해서만 유효하게 만들어지며 성장한다. 내가 '이러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은 사람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만 규정되는 것이다. 


이웃의 얼굴처럼 흔하게 존재하는 악의 구렁텅이를 넘어 인간의 불확실성에 기조한 정치 세태를 논하고 시장과 정치의 미래를 점치는 여정을 지나 두 학자가 겨우, 그래서 진실로 말하고 싶은 '희망'은 이것이다. 모든 것이 변한다고 해도  "어쨌든 신은 우리 안에 공동체와 사회성의 힘으로서 존재하며, 사랑과 충실함은 우리 안에 있는 신의 언어" 264p(변주) 라는 것. 더 이상 개인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우엘 백의 예언과도 같은 소설이 얼마간의 사실인 듯한 가운데서도 이들은 '사랑'을 이야기 한다. 그것만이 세계에 가리워진 '도덕적 불감증'을 이겨낼 수 있는 대안이라는, 사회 정치 역사를 종횡하며 도착한 두 학자의 믿을만한 처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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