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서평/시와 소설

피그말리온

_봄밤 2014. 1. 20. 17:17


 

1. 피그말리온과 말(言)

 제목으로 알 수 있듯 이 희곡은 '피그말리온 이야기'의 뼈대를 빌려왔다. 알다시피 "피그말리온 이야기"의 핵심은 아름다운 조각상이 '피그말리온이 원하는 여자가 되었다'는데 있다. 우리의 주인공 히긴스는 자신이 가르친 대로 리자가 성공적인 말씨를 갖게 되는 것을 본다. 신화 속에서라면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야 하지만, 버나드 쇼는 사람이 된 조각상, 즉 갈라테이야가 자아를 가졌을 경우 피그말리온과 갈라테이야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해 했던 것이다. 피그말리온이 갈리테이야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 기도와 사랑이었다면, 히긴스의 경우 리자를 완성하게 한 것은 그의 말-그 가운데 '소리'라고 할 수 있다. 버나드 쇼는 피그말리온의 마법을 풀 열쇠로 '말-소리'에 대하여 끈질기게 따라 붙는다. 이것은 피그말리온과 말에 관한 희곡이라고 할 수 있다.  

2. 말(言)과 사회 


 버나드 쇼는 계층에 따른 언어의 차이에 대해 작정하고 주목한다. 당시 영국의 사회계층을 언어-그 중에서도 말의 차이에 대해 파고드는 것이다. 비보호대상 빈민층이 사는 거리의 말, 신분상승을 이룬 중산층의 말, 일라이자가 헝가리 왕족으로 오해 받는 장면 등 다수의 계층을 넘나드는 장면의 조영은 '말'이 갖고 있는 힘, 계층을 대표하는 언어의 쓰임에 대한 흥미로운 관찰기다. 그러나 이 정도로 그의 말에 대한 추적을 다 표현 할 수는 없다.


 문자가 아니라 '소리'에 대한 천착은, '대화'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한다. 그것은 단순히 의사소통을 이루는 수단이 아니라 신체적인 행동에 가깝다대화가 통한다는 것은 어떤 공동체에서 이뤄지기 쉽다. 공동체는 단순히 지역과 나이 등으로 구분할 수도 있지만,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공간(지역)과 시간(나이)외에도 외부의 요인-사회적인 지위에서 오는 관습과 경제적인 차이로 구분될 수 있다. 다양한 빗금으로 나눠지는 공동체는 서로의 관심사와 대상이 다르며, 호불호가 다르고, 크게는 삶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말투가 다르다고 해서, 그 속에 깃들었을 영혼의 그것까지 가늠할 수 있는 것일까. 히긴스는, 말씨에 가려져 영혼까지 그늘져 보이는 것을 탐탁지 않아했던 것 같다. 그래서 발음을 교정하려고 했던 것이겠지. 영국에 필요한 혁명가는 다름아닌 음성학자라는 그의 주장은 터무니 없는 궤변으로 들리지 않는다. 


3. (言)과 영혼


그러니 '말도 섞지 말라.' 속담은 이야기는 단순히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전해지는 정신의 교류 또한 단절하라는 암시인 것이다. 그것은 공동체 안에서 벌어진다기 보다 계층과 계층 사이에서 벌어지기 쉽다. 말을 하지 않는 것은 이해의 단절이다. 자신들이 지켜야 할 유리한 지점-배타성을 위해서 끊임없이 둘레를 막는다. 책 <울지 않는 늑대>에서는 주인공은 늑대의 울음소리를 알아듣는 에스키모 친구를 가리켜 '영혼은 거의 늑대'라고 말한다. 에스키모인들이 늑대의 소리를 알아듣고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소리를 알아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음가가 아닌, 그 속에 있는 영혼을 만난다는 뜻이며, 어느 공동체와 통하는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들의 영혼을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이된다.


그래서 나는 어떤 장면보다 일라이자가 아직 꽃 파는 소녀 일 때, 히긴스의 독설을 맞고 완전히 압도된 장면이 오래 남는다. 


그런 우울하고 역겨운 소리나 하는 여자는 어디에도 있을 권리가 없어. 살 자격도 없다고. 너는 영혼을 가진 인간임을 기억해. 신이 주신 똑똑하게 발음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네 모국어는 셰익스피어와 밀턴 그리고 성서의 언어야. 그러니까 거기 앉아서 성질난 비둘기처럼 구구대지좀 말라고. 35


그녀는 자신의 가난과, 권리에 대해서 발끈하며 자신의 소리를 낼 줄은 알았지만 자신이 갖고 있을 영혼의 고고함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을 깨우치게 돕거나 비난한 사람이 없었던 것은, 그녀가 사용하는 공동체-빈민층의 말이 영혼을 생각하는데 까지 이르러 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하루를 사는 것에만 대화를-생각을 써야 했다. 리자는 난로를 키기 위해 돈을 넣을 때 웃었다. 실제로는 그녀의 몸이 웃었던 것이지만 자신이 가졌다고 생각하는 영혼이 웃는 일이었다. 버나드 쇼의 비판에서 "기본소득"을 읽어낸다면 어떨까.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신의 생물학적인 삶을 위해서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일을 포기하게 된다.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말만 하는 것을 경계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최소한의 생각만을 보장하는 것이다. 이것이 계층을 공고히 하는 기반이 된다. 말의 차이가 점점 벌어지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4. 히긴스와 일라이자

 일라이자는 빈민층의'말'을 탈피하고 상류층의 '말'을 얻음으로써 자유롭게 '생각'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된다. 히긴스 밑에서 (씻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고)먹는 것을 얻기 위해 온힘을 다해 집중했던 날들이 지났기 때문이다. 이후 그녀는 슬리퍼를 히긴스에게 집어 던짐으로써 자신의 영혼의 정당한 위치를 얻어내려 한다. 
 갈라테이야 현대판 모습이라고 해야할까. 희곡에서는 귀여운 앙탈정도로도 볼 수 있지만 계급 투쟁의 하나로도 읽을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히긴스에게 왜 우리는 자유롭고 즐거운 대화를 할 수 없는지, 대등하게 이야기 할 수 없는지, 더불어 자신의 존재가치는 무엇인지 묻는다. 그녀가 바란 것은 교정된 발음으로 똑똑한 목소리와 기품으로 오가는 대화가 아니라, 사랑이 충족된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히긴스는 그녀를 동등한 대상으로 인정할 수는 있었으나 [일라이자. 내가 너를 여자로 만들었구나. 그랬어. 난 이런 네가 좋아. 199] 라고 말하면서도 이것이 사랑의 속성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이 둘의 어긋남을 암시하는 마지막과, 그런 마지막에 못을 박는 후일담은 구태연연한 신데렐라 이야기의 외피를 쓰고서도 독보적인 신선함을 갖고 있다. 이러한 결말이 바람직하지만 한편으로 아쉬움을 남기 것은 아마 남녀 모두에게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남자라면 한 여자를 구원할 수 있는 전능한 모델의 동일화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겠고, 여자라면 신데렐라 증후군이 갖고 있는 나약하고 아름다운 구원의 완성이 이뤄지지 않았던 것에서 말이다. 그래서 이후 발표된 연극과 영화가 그 둘이 명백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원작의 '후일담'을 알면서도,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결말로 각도를 정정했던 것이다.  


5. 현대판 피그말리온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의 꽃 파는 소녀가 히긴스를 처음 만나러 왔을 때, 최대한 꾸미고자 차렸던 옷과 모자를 기억해보자. 상류층의 그것을 따라 허세를 갖게 했던 타조 깃털 달린 모자를 말이다. 그녀는 그것을 슬리퍼와 마찬가지로 던져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리자는 자신이 있었던 세계와, 자신이 새롭게 탄생했던 세계 모두에게로부터 나갈 수 있다. 


(완벽하게 우아한 말투로)걷는다고요! 좆나게 걸을 필요가 있나요. (좌중이 동요한다) 택시 타고 갈거예요. (나간다) 117


그녀가 도착한 곳은 사랑으로 채워진 말이 있는 -프레디가 있는 곳이었다. 버나드 쇼는 신랄하고 못되쳐먹은 히긴스를 내세워 이 모든 것을 말한 후에 결국 이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최상의 발음교정은 그녀를 왕족으로 보이게 해 계층의 허구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상류층의 말씨 속에서도 결코 알 수 없는 말이 있으니 '사랑의 말'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가르치거나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피그말리온, 내가 원하는 사람이 원하는 모양으로 있어준다. 오래 전의 꿈이다. 오늘날의 갈라테이야는 당신이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산다. 공작 부인(상류층)으로서의 삶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사랑하는 이와 함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라이자처럼. 히긴스가 만들었으나, 만든이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삶이다. 길게 돌아왔으나 이것이, 버나드 쇼가 들려주고 싶었던 현대판 "피그말리온 이야기"가 아닐까.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