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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있다'를 읽다

_봄밤 2014. 1. 12. 23:36


'있다'를 읽다




진은영,『훔쳐가는 노래』, 창비, 2012.

시,「있다」에 대한 리뷰입니다.




 오랫동안 갈아 단칼에 빼든 첫 번째 시. 가장 처음에 실리는 시를 고르는 시인의 마음은 어떤 것 일까? 시인이 아니고서야 알 수 없는 일들을 궁금해 하는 것은 첫 시는 온화해 보여도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문제를 갖고 있거나 혹은 아예 작정하고 찌릿하게 감전시켜 다음 시들에 대해 무감각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떤 시를 첫 번째로 싣는지의 문제는 시인의 포부(혹은 전략?일 수도 있으려나) 라고 생각한다. 이 시집은 첫 번째 시는 후자에 가깝다. 전문을 실어본다.

 


창백한 달빛에 네가 너의 여윈 팔과 다리를 만져보고 있다

밤이 목초 향기의 커튼을 살짝 들치고 엿보고 있다

달빛 아래 추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빨간 손전등 두개의 빛이

가위처럼 회청색 하늘을 자르고 있다

 

창 전면에 롤스크린이 쳐진 정오의 방처럼

책의 몇 줄이 환해질 때가 있다

창밖을 지나가는 알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가 있다 
여기에 네가 있다 어린 시절의 작은 알코올램프가 있다

늪 위로 쏟아지는 버드나무 노란 꽃가루가 있다

죽은 가지 위에 밤새 우는 것들이 있다

그 울음이 비에 젖은 속옷처럼 온몸에 달라붙을 때가 있다

 

확인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깨진 나팔의 비명처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

 

「있다」전문


 철학을 공부한 시인은 자신의 시집의 첫 시를 '있다'라고 했다. 모든 것의 존재를 부르며 시집을 시작하는 것. 얼마나 포부인지. 그 '있다'는 확실한 대상에서 마침내 있는지 확인 할 수 없는 것에 이른다. 그것조차 '있다' 이므로. 시인이 말하고 싶은 모든 대상. 어떤 시공간에도 거리낌 없이 다만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때' 마져도 말할 것이며, 확인 할 수 없는 존재가 '있다' 라는 주위 조차도 노래할 것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있음을 호명한 것이 아니라, 그 모든 '있음'에 대하여 쓰겠다는 시인의 강한 의지가 '있음'을 말한다.

 

가장 놀라운 부분은 '집 둘레에 노래가 있다' 라는 것이다. 그 노래는 '투신한 여자의 얼굴 위로 펼쳐진 넓은 치마처럼, 물결 위를 떠도는 낙하산처럼, 깨진 나팔의 비명처럼' 있다. 과연 집 둘레에 노래는 단순히 '노래'라고 했을 때 전해오는 즐겁고 밝은 이미지가 아닌 죽음에 펴지는 그늘과, 지면이 아니라 물결위에 닿을 수도 있는 빠지지 않고는 빠져나올 수 없는 아슬함과, 마침내 깨져서 나오는 시끄러운 마음의 소리를 모두 둘러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집 둘레에 노래란 그 수많은 표정을 이르는 말이다. '집 둘레' 라는 것도 간결하면서, 대체 불가능해 보이는 반짝이는 말이다. 이 시 하나 만으로도 시집은 환하고 단단하게 빛난다.

 

첫 번째 시에 어벙벙해져 말미로 끌려가고 있던 중 중간쯤의 짧은 시에 걸려 넘어졌다. 오랫동안 무릎이 아니라 멍든 소리를 비벼야 했다. 한때 위로해줬던 환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위로인 척 하는 것에 위로 받아 뭉그러졌던 마음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도 하며.

 

 

손바닥 위에 빗물이 죽은 이들의 이름을 가만히 써주는 것 같다

너는 부드러운 하느님

전원을 끄면

부드럽게 흘러가던 환멸이

돼지기름처럼 하얗게 응고된다

 

「음악」전문

 

 음악에서 느끼는 감정의 변화를 이토록 아프게 찔러 올 수 있나. 돼지기름처럼 이라고 굳이, 굳이, 말해야 했나. 굳이, 굳이, 다만 음악에 취해서 잊는 3분의 시간을 그렇게 지리멸렬하게 그려야했나. 굳이, 굳이, 위로라고 믿고 싶었던 마음의 응어리를 환멸이라고 발가 벗겨야 했나. 굳이, 굳이,

 



 

 새로운 표지로 그 동안 말끔한 얼굴의 창비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간결한 배치를 용기 있게 떠나 시와 더욱 소통하게 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름답다. 해설이 실리지 않아 아쉬웠다. 해설이 이해를 돕는 것은 당연하다. 한 동안 코끼리 엉덩이만 만지며 훔쳐가는 노래를 이해할 내가 아둔하니까 좀더 알 고 싶은데. 이 시집만 없는 것인지 앞으로 나오는 시집에 해설이 종종 생략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사 볼 수 밖에) 

 

그래도 뒷장에 심보선 시인의 말이 해설의 빈자리를 이해하는 것인지, 시 속에서 적잖히 헤맬 독자를 배려한 것인지, 빼곡히 적혀 있어 다행이었다. 다만 십오초 정도는- 시집을 이해한 듯 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작성 : 2012/10/02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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