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손가락을 펼치면 여러 개의 사 이 가 생 긴 다 손가락 사이로는 무엇도 잡을 수 없으므로, 손가락은 자신을 지나가는 모두를 잡지 않아도 되었다. 손가락은 좀 자유로워졌고, 조금 외로워졌다. 당신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 한 손에 다 있다.

 

태아가 뱃속에 있을 때, 손과 발에는 오리의 발처럼 갈퀴가 있었다고 한다. 후에 갈퀴 부분이 사라지면서 사이가 있는 손가락의 형태를 이룬다고 한다. 지금의 ''를 이루기 위해 세포의 예정된죽음이 있었다. '아포토시스'. 해서 누구나, 죽음으로써 탄생하는 생을 산다. 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따뜻한 손인 줄 알았는데, 사라진 자리가 삶을 지탱하고 있다.


'사탕'은 달콤하고 황홀한 말, 완벽(죽음)에 이르고 싶은 산 사람의 목표이고. '차가운 사탕'은 그 말들을 그만 뱉을 수 밖에 없었던 현상(삶)의 결과다시인이 '존재'하는 한 언어는 다 말해질 수 없으며, 완전해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작은 시집에는 너무나 많은 말이 제한없이 행간을 질주한다. 완벽하고자 하는 시인의 활달한 언어만큼 그 크기의 불가능성이 뒤를 바짝 쫒는다. 어떤 단위도 헤아릴 수 없는 폭을 여러차례 건너려는 시도. "지구의 중력이 인간의 피를 끌어당기기 때문에 피는 심장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빛이 폭발하면 별을 볼 수 있다"「관측」부분. 심장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피과 빛이 폭발하면 별을 볼 수 있다는 '아득한 사이'를 보라. 고개를 들면 내 피는 어느덧 매일매일 흘러가는 별자리가 되는 

  

풍경에 물아일체가 떠오른다. 내 피가 우주를 채우고 있으니, 내가 곧 우주이고 또 우주가 곧 나인 것인가. 이런 접근은 대상에 대해 가장 정확한 질량을 갖는 언어가 되고자는 간절과. 자신이 뱉음으로써 한계를 갖고 어떤 대상의 본질이 될 수 없음에 대한 괴로운 고백으로 들린다. 하나의 목소리에서 두 개의 마음을 본다. 


죽음의 이미지가 산뜻하게 그려지는 것은 언어가 움직지 않는, 종결의 자리에 있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 중국 절벽에 가서 뛰어내리기 내기를 할까” 가벼운 목소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길을 잃었다는 것뿐 태어난 곳도 사라진 곳도 인간의 문자로는 남길 수 없겠지신년회부분. 이어진다. 시인이 절벽으로 가자며 가볍게 청하는 것은 어떤 것도 '인간의 문자'로는 남길 수 없다는 '절망'에서 비롯된다. 죽어버릴까, 시인의 소임은 자신을 통과한 세상을 언어로 써내려가는 것인데 '신년'을 몇 번을 통과해도 '신년회'라고 삼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언어는 정확해지려고 할 수록 그만큼의 오차를 남긴다. 아주 다른 세상, 진심으로 맞을 수 있는 신년회는 그런것이 아닐까. 다른 세계로 가버리는 것. 새로 태어나야겠다. 그래서 선택한 '중국의 절벽'을 보자. 묘하게도 복숭아 밭이 있을 것 같고 아바타의 공간이 펼쳐질 것 같다. 다시말하면, 시인의 절망에서 비롯된 죽음의 절망으로 끝나버리는 죽음이 아니라, 다시 새로운 세계로 닿으려는 욕망인 셈이다. 뛰어내리는 곳은 '태어난 곳과 더불어 사라진 곳'을 인간의 문자로 남길 수 있는 곳일지 모른다. 엎치락뒤치락 하는 움직임, 탄생과 죽음이 서로를 향해가는 이중주를 보는 것 같다.


다른 세계로 깡총가고 싶은 절망(희망)은 알지도 못하는 부족의 전언을 이해하고 싶은 움직임이 된다. “만져보기도 전에 사라진 부족은 꿈을 깨끗하게 씻으라는 전언을 남겼지 어떻게 하면 물속에 꿈을 담글 수 있나우리는 헤어진다부분. 만져보기도 전에 사라진 부족을 '사라진 언어'로 짐작해 본다. 시인의 절망은 신년회에서도 말했던 ‘언어의 무력함에 있는 것 같지. 문자는 '소통'의 도구인 '언어'  혹은 '문학 전체'로도 변주가 가능할 것 같다. 여기서 "사라진 부족"은 ‘사라진 언어그 자체를 말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누군가와 관계를 가질 때 생겨난 둘 만의 소통를 이르는 것은 아닐까 짐작한다. 관계가 생기면 둘 만이 소통할 수 있었던 언어가 생기는데, 마찬가지로 관계가 사라지면 언어도 사라져버린다. 그러니 세상에는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언어 외에도, 관계로부터 생겨나는 수없이 많은 언어의 명멸이 있는 것이다. 관계의 언어는 단 한번의 탄생과 단 한번의 죽음을 갖는다. 후에 오래전 그 언어가 그리워져도 다시는 쓸 수 없다. 그것을 말없이 지켜보던 시인은 제목을 우리는 헤어진다라고 붙였는지.

 

다음에 이어지는 시로 '귀로'를 이해한다. 살아 있으나, 삶보다 죽음에 가까이 있는 이들에게 가닿는 것. 언어가 늙는다는 일은 어떤 것일까. 언어가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어떤 느낌일까. “노인들은 서로를 죽은 자로 대할 수 있기 때문에 등을 쓸어준다. 솟아오른 등뼈가 조금씩 부드러워지도록.야유회부분.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죽은 자로 대한다는 것은 '침묵'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말이겠다. 말이 없어도, 정확하게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나의 감정을 설명하지 않아도. 늙은 손은 등을 쓸어주며 등뼈를 부드럽게 한다. 곱아왔던 시간을 개켜주려는 표정은 다정이 비롯되는 시간이다. 언어가 소멸하는 중에는 침묵이라는 언어의 마지막이 있다는 것. 그 빛을 담는 시인이 있다. 이런 포착은『헝가리 식당』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침묵을 먹으면 알 수 있다. 어떤 슬픈 이야기도 죽지 않고 그릇 안에 담겨 있다." 침묵은 언어가 표현되는 마지막의 일이고, 또 침묵은 언어 있기 이전의 처음 일어나는 일이다. 호흡이 없는 말과 호흡을 놓는 말 사이에 언어가 생긴다. '싱어송 라이터'를 이름으로 한 시가 여러 편 있는 것은 이에 대한 마음이겠다. 

 

언어에 대한 물음은 "내가 죽어 누워있을 때"로 이어진다. 후에, 나는, 그리고 나의 언어는 어떻게 누워 있을까. 시인이라서 궁금한 물음이다. “그가 곧 지워질 외국어로 내 출생지를 쓸 때/ 모래가 젖고// 우산은 둥둥 뜬다/ 바람이 만든 봉분 안에서모래점을 친다부분. '곧 지워질 외국어로 나의 출생지를 쓰는 일'은 미래에 세워질 나의 묘지, 아니 내가 써왔던 언어의 묘지를 이르는 것일까. 그것은 바람이 만든 봉분 안에 있어서 아무도 볼 수 없다. '말' 그러니까 언어는 보이지 않지만 시인의 거의 모든 것을 이뤄왔을 세계다. 그리고 시인 뿐만 아니라(물론 시인에게 가장 무겁게 있겠지만) 모든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인 일이다. 시인에게 자신의 죽음만큼 중요하게 생각해두고 싶은 언어의 죽음을 생각했다. 모래처럼. 모래는 하나가 아니고, 모래는 무리로 있어서 자신의 흔적을 모두의 사이로 밀어넣는 아주 작고 많은 조각이다. 언어 역시 모래의 배열처럼 눈에 띄지 않는 죽음을 셀 수 없이 이어가고 있고, 그래서 '죽음'이라는 말에 소원해지지 않는 거대한 언어의 언덕이 있는지도 몰라. 언어의 묘지에 가서 그것을 애도하는 시인의 손. 그리고 뒤편으로 펼쳐진 또 다른 언어들의 태동을 느끼는 시인의 발. 


"발등에서 일렁이는 달의 무늬. 언제 죽었던 것일까요. 한여름에도 목에 수건을 감고 잠이 듭니다. 그 사람이 좋아서 우주 공간으로 퍼져 나가는 바람의 사람이 됩니다. 나는 이제 진짜 시간을 배울 수 있을까요." 「미라의 잠」부분. 자, 이제 죽음 뒤에 진정한 시간이 시작된다는 믿음을 헝크러트리자. 어제의 목소리가 되돌아 오지 않는 것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말의 죽음을 매 순간 목격하고 있는 셈이니까. 그렇게 긴 잠을 자지 않아도, 당신의 한 밤만으로도 말은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큰 죽음을 기다리지 말자. 그것이 기가막힌 새로운 세상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말자. 애초에 당신. 손가락 사이를 만들었던 예정된 죽음이 다시 한 번. 예정된 곳을 향해 달려가는 일에 완전히


두 팔을 벌려 내달릴 뿐이다. 이곳에, 살아 있음을.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