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낙타
그것은 낙타가 아니라도 괜찮았다. 낙타는 무엇으로도 치환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낙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날 점심, 한데 모여있던 이들이 그 자리에 없는 '어떤 것'을 대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직접 보았냐는 물음이 오갔고, 혹 두개! 본 적 있어요. 라는 대답이 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후에 터진 폭소인데. 낙타를 본 적은 없어도 혹이 하나, 혹은 두개라는 건 안다는 대답이 그 앞에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낙타를 직접 보지 않아도 낙타에 혹이 있다는 것을 안다. 낙타는 그정도로 유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직접 보았다는 이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에게는 낙타를 직접 보았는지에 대한 증명이 '필요'했으나. 직접 본 낙타와 익히 알고 있는 낙타에 우열이 생길 만큼 낙타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돌아와 그건 낙타를 보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낙타를 진짜 본 것(처럼)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해도 그가 낙타를 직접 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진실에는 설명하기 어렵다는 속성이 있다. 나는 낙타가 아니라 진실에 대해 이야기 하고 싶다.
무릎을 모으고. 낙타와의 첫 번째 만남을 떠올려 본다. 아무래도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왔던 엑스표를 친 집들과, 어스름한 저녁과 기름통 그 냄새 사이에 있었던 것 같은데. 낙타가 확실히 그곳에 있었는지는 말할 수 없다. 어떤 이야기인지 복원할 수 없을정도로 조각나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더 기억하지 않기로 한다.
수 많은 여름이 있었지만 당신이 내게 그런 여름이 있었냐고 물었을 때, 낙타의 이야기와 구분할 수 없는 유사한 지점이 있음을 떠올렸다. <그 여름의 끝>을 어떻게 알겠는가. 시집에는 샀던 날짜를 표기하는 편인데 다만 이렇게 적혀 있을 뿐이었다.
"입을 틀어막고 우는 울음"
무슨 뜻인지 나라고 알 수가 있겠나. 황망한 얼굴이 마주쳤다. 이 시집을 샀을 때, 혹은 저 단문을 썼을 때의 심정이 그랬던 것이다. 어떤 이야기인지 복원할 수 없을정도로 조각났다. 그렇다면 기억나지 않는 것이 좋겠지. 하지만 '기억'과 '느낌'은 별개의 것 아니던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는 시인이 있다.
"종이 위의 물방울이/ 한참을 마르지 않다가/ 물방울 사라진 자리에/ 얼룩이 지고 비틀려/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있다" 「느낌」 부분. 누군가 내게 다시 낙타를 묻는다면 낙타의 털, 낙타의 혹, 낙타의 침, 낙타의 키와 낙타의 눈썹을 이야기 하지 않고 이 시를 가만 가만 불러주고 싶다. 물방울처럼 미약한 만남이 비틀린 흔적을 남긴다. 때를 지나와 내가 당신에 대해서 조금도 알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이를테면 그 시간들이 헛것이었던 것처럼, 없었던 일처럼 마냥 부드럽게 지나지는 않았다. 마음이 투명한 물방울처럼 있었다는 말이다. 어디가 구겨지거나 찢어져야만 흔적이 아니다. 종이에 원형으로 말라가는 시간. 몸에도 머물다 갔다.
가장 마지막장에는 표제시가 있다.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아습니다"「그 여름의 끝」 부분. 삼연으로 이어진 시의 첫 연이다. 아직 시작되지 않은 비극이 붉어서 이후의 연을 다 말할 수는 없다. 백일홍은 백 일 동안 핀다는 꽃이다. 아주 오래 간다는 이야기다. 몇차례의 폭풍에도 어떻게든 백일을 채운다는 것처럼 애써 지키고 있는 붉은 얼굴이 보인다. 당신과의 인연에 누군가는 백일홍처럼 버티었던것은 아닐까. 탄생으로부터 끝을 예감하는 이름으로 '백일홍'은 도드라진다. 예전의 일을 다하려면 입이 마른다. 당신 혹은 내가 백일홍이라는 이름이었던 것이 아니라, 둘 사이에 간직할 만한 시간의 이름이 그랬던 것은 아닐지. 알지 못해도 그만인 것들이 많은 가운데, 여름이 불러오는 느낌이 대체로 이렇게 어둡다. 다시, 낙타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한다.
낙타의 체온은 놀랍게도 낮에 6도 정도를 유지하고 밤에는 더 내려간다고 한다. 낙타는 아주 차가운 것이다. 이를테면 가을도 어느만치 깊어진 가을쯤 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체온보다 30도가 낮은 낙타의 온기. <그 여름의 끝>이 오고나면 낙타의 체온과도 같은 날들이 이어진다. 언젠가 더운 날씨에는 낙타끼리 서로 몸을 비비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사막의 공기보다 다른 낙타의 몸이 더 시원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우리의 몸이 자주 곁을 두었던 것은 여름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고 후에 여름을 남겨두고 떠났던 이유는 여름보다 더 견디기 어려웠던 서로의 존재였음일지. 온유한 낙타여. 여름과 당신이 이렇게 어울릴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러니까 오늘 점심때만 하더라도 몰랐던 일이니까. 말미에 와서 하는 말인데 나는 낙타를 알게 된 것이 조금도 기쁘지 않다. <그 여름의 끝>에 대해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던 것처럼. 꽃이 지지 않도록 그 뒤에도 여름이 올 것을 그때는 다분히 믿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