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비가 왔다
_봄밤
2014. 3. 29. 23:03
장날에 비가 왔다.
꽃이 조금 더 뜸을 들이고 피지않을까. 비가 봄을 늦추지 않을까 반가웠다. 무엇을 살지 아는 마음과 무엇을 살지 모르는 마음들이 서로를 알아보지 못했다. 차박차박 걸었다. 비가 와서 좁디 좁은 길은 더 못났다. 머리에 빗방울을 이고 계신 할머니들 언제부터 가늘은 비에 젖고 계셨나. 천막 칠만한 여력이 없는 도로 인접한 인도, 할머니들은 등 뒤로 오가는 차를 마주하고 앞으로는 쑥이니 달래니 봄동과 함께 송글송글하다. 자신만을 알아보지 못하는 애처로움이 길마다 있어 우산을 접었다. 골목으로 들어가니 빨간 다라에 담긴 프리지아는 여전히 한 단에 천원이고 그 옆에는 가래떡이 삼천원이란다. 좌판 멀찍이 서 있다가 '노가리 맛있어요'라는 설명을 들었다. 그제야 배와 등을 나란히 한 노가리가 들어왔다. 노란색이었다. 꽃을 사려는 모양으로는 생기지 않았던 모양인지, 머쓱해 흰색과 노란색 프리지아 사이로 한 발짝 옮겼다. 활짝 핀 것이 하나도 없는 걸로 골랐다. 꽃을 들자마자 아직 장을 다 보지 못한 것이 떠올라 잠시 맡겨 달라고 했다.
천막으로 기워진 장날의 천장은 가장자리마다 빗방울을 떨궜다. 크고 천천히, 비가 아닌 것으로 떨어졌다. 딸기가 다라마다 가득했다. 오천원부터 만원까지 다양했다. 다라는 넓었지만 깊이가 매우 얕았고, 딸기 향은 좋았지만 딸기 앞에서 망설이지는 않았다. 대신 야트막한 언덕에 제맘대로 엉키며 자랐던 딸기, 모양도 맛도 제 멋대로였던 집 앞 뜰을 생각했다. 늘 가던 떡집에서 떡을 한 봉지 사고 그 옆 좌판에서 콩나물을 담았다.
농협까지 들리고 나오니 이미 한 짐이었고, 그날의 장은 마감이어야 했다. 그러나 조막만한 사과가 크게 담겨 있는 것을 지나치지 못했다. 석이가 저번에 사과를 또 먹고 싶다는 말을 조심스레 물어왔다. '사자', 활짝 대답했지만 저번에 먹었던 것으로는 살 수 없었다. 좌판 앞 잘라 놓은 것을 먹었더니 달더라, 물어본다는 것이 혹시 흠이 있는 것이냐는 말을 채 다 꺼내기 전에, 그게 무슨 소리냐는 원성을 들었다. 혹시 기스사과는 아니냐고 다시 여쭈니 '보라'고 하셨다. 사과는 깨끗했다. 나는 이제 두 짐을 졌다.
비가 왔고, 길이 멀었다. 집에 돌아와 사과를 씻었다. 겉에 기스는 없었으나 반으로 자르니 꼭지가 썩어있었다. 그 가격에 한 바구니씩 담겨있는 사연을 모르는 것도 아니었으면서 그럴리 없다는 좋은 사과라는 대답을 듣고 싶었나. 한입 깨무니, 사과의 진한 향이 밀려왔다. 그것은 거의 끝에 내몰려서 나는 향이었다. 달기가 진해서 조금 신 것 같기도 하고 최초에는 깡깡하게 물리는 껍질이 뭉근하게 이를 감쌌는게 느껴졌다. 음을 모르는 한숨. 나는 그런 사과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으면서, 그것을 낑낑거리며 한 바구니를 들고와서, 마침내 먹고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실망이 밀려왔다는 것처럼, 두 입 베어 먹은 사과를 쥔 채 싱크대에 기댔다. 사과 곁에 넣어두었던 프리지아는 초록색 단이 조금씩 부러져 있었다.
베란다 밖으로 비가 왔고 어느새 핀 벚꽃이 비를 맞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