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슬픔은 이제-유병록
_봄밤
2021. 2. 14. 00:17
슬픔은 이제
유병록
아무렇지 않은 척
고요해진 척
회사에서는 손인 척 일하지
술자리에서는 입인 척 웃고 떠들지
거리에서는 평범한 발인 척 걷지
슬픔을 들킨다면
사람들은 곤란해할 거야 나는 부끄러워질 거야
네가 떠오를 때마다
고개를 흔들지 몸속 깊숙한 곳으로 밀어두지
구덩이 속에서 너는 울고 있겠지만
내가 나에게 슬픔을 숨길 수 있을 때까지
모르는 척
내가 나를 속일 수 있을 때까지
괜찮아진 척
시집 <아무 다짐도 하지 않기로 해요>중에서(2020. 10월 출간,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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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랜만에 읽은 시.
'사람들은 곤란해할 거야 나는 부끄러워질 거야'부분에서 '거야'앞에 띄어쓰기가 있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엄청 크게 보였다. 그 한 칸에 곧 곤란해해지거나 부끄러워질 시간이 충분히 있다는 것처럼.
시를 읽을 때는 별 의미 없을 띄어쓰기가 너무나 크게 보인다. 다음에 올 단어와 입모양을 차근히 준비하게 된다. 애초에 글자가 몇 개 없고, 몇 개 없어서 상상하게 되고. 적은 단어를 그러모아서 이렇게 썼다가 지웠다가. 생각을 그때마다 하나씩 모아두었다가. 붙여 썼다가 시간을 만들었다가 아니 지웠다가, 사람이 사라졌다가. 새로운 구덩이를 이쯤에서 보일까 말까 하다가... 그런 것들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