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의 글

삼십육계 줄행랑

_봄밤 2020. 7. 19. 21:20

삼국지 생각이 난다. 모래바람이 일고 사람이 죽어나가는 피냄새, 환란이 이는 세상에 눈 돌리고 싶다. 이불이 따뜻한 침대에서 그들을 가여워하면서. 아이고, 어쩌나, 하나마나한 추임새를 하면서. 도망쳐야 할 때 도망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다. 거기엔 목숨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임을 잘 아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삼십육계 줄행랑. 요새 나는 제자리에서 쏟아지는 화살을 피하는 것만 같고. 마음만으로 피할 수있는 화살이 없다는 걸 알면서 그만하기를. 바라고만 있다. 잘 도망하는 것도 전략이었겠지. 그에 비하면 이곳은 얼마나 깔끔한가. 

 

비가 오는 날에 서핑을 했다. 여기서 양양까지, 양양에서 다시 해변으로. 서핑은 힘들었고 보드는 너무 무거웠다. 안경을 벗어서 제대로 보이는 게 없었지만 제대로 보인다고 잘 탈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바다쪽이 아니라 해변쪽으로 타는 거라서 아무리 넘어지고 쏟아져도 물에 빠져 죽지는 않겠구나 싶었지만 파도가 커서 물 속에 처박히기 쉬웠다. 다시 일어나서 바다 쪽으로 나가서 꾸역꾸역 보드에 몸을 올리고 가까스로 일어났다. 그날 바닷물이 무척 검었는데 그때는 그냥 검은 바다구나 생각했다. 집에 돌아와 근처를 걷는데 도로 웅덩이에 고인 빗물의 색이 그와 같았다. 아. 이런 색의 바다에서 서핑을 했구나.

 

토요일 낮 두 시까지 잠을 자고 점심을 먹고는 다시 잠을 잤다. 일곱시에 일어났다. 꿈에서 수도 꼭지가 5개는 있는 화장실에서 손을 닦았다. 창 바깥으로 나무가 보였다. 굉장히 크고 넓었고, 타일이 조용하게 빛났다. 그런 곳에서 얼굴을 씻었는데. 

 

소진이 된다는 얘기는 무엇일까. 한달 뒤, 반년 뒤, 일년 뒤를 계획하는 마음이 사라진 것 같다. 오늘과 내일만 있는 기분이랄까. 이것도 다 지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지나간다는 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미래를 생각하면 나는 너무 젊고 이력서를 펴면 나이가 너무 많은 것 같다. 하루종일 자고 일어나면 그제서야 일어나는 옆집이 있는 곳에서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