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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멍을 멍으로 두기.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는 상흔의 기록
존재하는 순간부터 사람은 ‘나’라는 이름과 부모가 부르는 ‘자식’으로서의 이름을 갖는다. 이름 두 개로 시작. 관계에서 비롯된 이름의 증감으로 살아가는 것이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에서 시인은 세 개의 이름을 산다. 그것은 ‘딸’과 ‘애인’과 그리고 ‘나’로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약간의 변주만 가한다면 누구나 오래 지지고 있을 이름이기도 해서 시인의 이야기에서-나의 이야기로 오는 길이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온전한 음악일리 없다는 예감, 무너진 호칭으로 시작되는 제목에 고개가 무겁다. 활인지 톱인지, 아니면 줄을 다 끊어버리고 스스로 악기가 되어 속을 파내 두드리는 공명일지. 톤 다운된 보랏빛, 아마 밝은 색은 아닐 것이라는 친절한 귀띔을 조심스럽게 펴 본다.
1. 기우는 관계, 밀어 올리며 가라앉는 딸
호칭은 사람 사이의 추와 같아서 가볍고 무거운 상황을 잡아 소통을 이룬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관계를 살아간다. 이러한 호칭이 빠지거나 대체되는 것은 관계의 소멸일 것이다. 그렇다면 온전한 관계에서 호칭이 엉뚱하게 튀어 오르는 것을 끝을 벗어나려는 발버둥이라고 한다면 가혹한 그림일까.
불현듯 나를 처제, 라고 부른 아버지에게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불렀다’ 발화의 이후 한쪽에서 무너져 버린 관계를 어떻게 추스릴 수 있을까. 「뱀이 된 아버지」에서 그녀는 말없이 ‘아주 조금 찡그리고’는 처제가 아닌 것을 들키지 않는다. ‘팥죽색 얼굴’을 잊고 젊은 나이로 돌아간 아버지, 뱀이 된 말씀을 잠자코 듣는다. ‘눈을 감으렴/ 잠시,/ 눈을 감고 기도해주렴’ 나이를 잊어버린 자신을 눈감아 달라는 말씀일까. 딸의 존재도 잊고 오래 전 비슷한 나이었을 처제를 부른다. 그렇게 병이 든 몸도 잊고 죽음마저 잊어버리고 싶다. 시간을 뒤섞어서라도 온전해 질 수 있는 곳을 찾는다. 아버지 행방이 요원해지는 곳에서 아버지가 아닌 ‘당신’으로라도 나아 질 수 있다면, 나를 알지 못하는 아버지라도 길게 기다리고 싶다.
나이를 깎아도 허공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아버지, 나는 그 반대편에서 관계의 시소를 밀어 올린다. 그러나 호칭이 붕괴된 관계는 내가 서 있는 바닥을 가라앉히는데, 좀처럼 아버지 내려오지 못하시고 바닥이 둥글게 패인다. 이 둘레를 기억하기 위하여 시인은 시 곳곳에 아버지를 적는다. 온몸을 다 흔들어 놓는 ‘절망함’이 아버지라는 이름이었다고 고백한다.
2. 그늘과 어둠과 애인
아버지와 나의 관계보다 나와 애인의 관계는 파괴력의 크기는 몰라도 자주, 더, 요동할 것 같다. 서른이라는 나이에는 이 추측에 불과한 이야기를 믿게 하는 혐의가 있다.
‘어둠 속에서 그의 고환이 시계추처럼 흔들려요/그 흔들림에서 침묵의 율동을 보죠/살랑살랑, 나를 사랑해줄 것만 같아요’ 노골적이고 대담한 담화로 시작해 ‘우리의 그림자에 상처가 나면/ 싱싱하게 빛이 까져요/ 다시는 아물지 않겠다고 빛이 벗겨져요’ 「그러다 고인 빛-그림자」으로 나가는 마지막은 그림자에 상처 나는 연애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이곳은 이미 끝난 미래’ 사랑을 나누는 어두운 장소에서 불이 켜지면서 그림자가 사라진다. 그림자는 어두운 곳에서 깜깜하게 실루엣만 드러나는 나와 애인의 실체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밝아지면서 드러나는 몸은 어두운 모습을 뚫고 나와 색을 가진다. 안락하고 평화로웠던 어둔 세상을 찢고 실체로 행동해야 할 밝은 곳으로 나왔을 때 갖는 연인과의 유리를 말하는 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그림자-그늘의 이미지는 「연애의 그늘」 에서도 볼 수 있다. ‘포옹이 오래 고이면/ 몸은 하나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어떤 연애가 포옹을 하나의 덩어리로 불과하게 만드는가. ‘백 년을 씹어도 삼킬 수 없는 질길, /가죽 같은 시간이 있을 뿐/ 열렬한 잠 속엔 환영이 없다’ 지나도 지나지 않는 시간을 말하는 것이라면 권태겠다. 연애의 지리멸렬이라면 더 무엇을 말할 수 있겠나 싶지만 ‘깡마른 유령 둘이 사다리 위에 앉아/톡, 톡,/ 손톱을 깎고 있는 풍경’에 입을 다문다. 죽어버린 관계, ‘어둠을 늙’게 하는 연애의 그늘이 서늘타 못해 차다.
3. 무엇보다 ‘그냥’ 나
절망함 둘레를 퍼내다가 가라앉는 관계에서 죽어버리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르겠는 연애의 일말을 내리다가 「잠든 호리병」, 「바지를 벗다가」등의 시에서 혼자 있는 시인을 발견한다. 요동치는 상황을 벗어나 시인만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곳 참 맑아서 쓰여 있지 않은 것처럼 종이 있어도 투명하게 비치는 것처럼 들여다보인다.
‘당신과 내가 나란히 누워/곤히 잠든 시간들만 따로 모아/ 목이 긴 호리병에 담아놓고 싶다/ 따가운 볕 아래 펼쳐놓고/ 증발할 때까지/ 한 방울도 남김없이 사라질 때까지/ 맨송맨송한 민낯으로 바라보고 싶다’ 「잠든 호리병」 부분
무엇이 더 필요할까. 그런 시간이 나도 있었다고, 그것을 다 모아놓고 보고 싶은 마음이 있다고 고백한다. 행복한 시간을 모아 놓고 그것을 다 흘려보내는 모습, ‘빨간 입술로/ 순정했을까’ 자신에게 물으며 여전히 순정 아니라는 대답을 스스로 메운다. 그러나 ‘웃다가 그늘을 잃어버린 여자’여, 목이 긴 호리병에 넣고 싶은 잠이 참 많아서 언제고 외롭다고 마음 놓고 토했으면 좋겠다. 당신의 애인은 순정의 색을 ‘물을 닮은 촉촉함이었다고’ 촉감으로 기억할 것이다.
‘나는 괜찮지만/ 나 이외의 것들은 괜찮을까, 걱정하는 밤’ 「바지를 벗다가」에서 홀로 있는 서른 살 ‘그냥’ 여자를 바라본다. 누구나가 볼 수 있는 색이라면 순정이 아닐 것이다. 바지가 갖고 있는 흔적, 당신이 있었던 자리가 투명해서 순정한 것이다. 다시, 붉은 입술이 전했을 순정을 바라본다. 당신의 투명을 바라본다. 어깨가 안으로 다 기울도록 속을 비워내 빈 곳을 울리는 공명, 줄이 없어도 화음을 맞춘다. 어딘가 비뚤어졌으나 눈감고 듣고 싶은 노래를 덮는다. 휘청이고 싶은, 절룩이며 걷는 나의 리듬과 맞는다.
세 개의 이름으로 '누구나'를 살기. 내게도 세 개의 이름이 있어 대체로 번갈아 하루를 산다. 노트 한 구석, 이름을 하나를 적고 기억 하나를 적는다. 무슨 색이냐 묻다가 보라색은 멍이 멍으로 남는 색이라고 다른 대답을 한다. 내 속에 깊게 들어가 피가 고인 것 아니고, 다 빠져서 무슨 자국인지 알아 볼수 있는 것 아니다. 온전하게 부딪힌 순간을 적었더니 온몸이 고른 색이다. 멍을 멍으로 둔다. 사라지게 두고 싶지 않는 상흔, 사람이 있었다.
+ 사진 출처 : 알라딘
작성 : 2013/10/30 2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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